곡 유인호 교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으로 민중적 입장에서 일관되게 ‘학문과 삶',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이루어내신, 참으로 귀중한 학자의 전형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대부분의 진보학자들이 월북하거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격하게 보수화되는 사회분위기에 휩쓸려 학문방향을 바꿀 때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관되게 민중적 입장을 주장하여 분단 후 남한 경제학계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진보적 학풍에 맥을 잇고, 한국 경제사 분야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학이 통치수단이자 지배이데올로기로 횡행하여 온 세월들 속에, 선생의 경제학은 ‘대항과 실천의' 경제학이었다. 이미 5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의 피폐해진 경제구조에 대해 선생은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초기에는 한국재생산구조의 문제에 천착하여 한국자본주의는 미국을 위시로 한 선진제국주의에 포섭당해 저발전의 식민지로 전락할 소지를 안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러한 상황인식 속에서 자주적 민족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민족적 과제를 제기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원조경제의 본질규명에 진력한다. 미국의 잉여생산물인 미곡(米穀)의 대한(對韓) 무상원조는 국내에서는 쌀가격을 하락시켜 국내 농업기반을 황폐화시키고, 농업에서 파생된 실업자가 도시로 과잉유입되면서 공업분야의 노동자로 전락하여 저임금구조를 온존시키며, 결국 한국은 미국의 생산부품을 저가로 공급하는 부품 생산지이며, 또한 미국이 생산한 소비재의 상품소비지로 전락하는 경로를 해명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발본적으로 제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선생의 고집스러움과 학문적 지조는 매번 당대의 시대상황에 마주하여 그 주제를 에돌아 나가지 않고 당당히 맞서 주장을 설파하였는데 오늘날 개별경제학의 주제인 공해(환경경제학), 쌀, 식량, 석유(농업경제학, 자원경제학) 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출하였다.

  공해와 환경에 대해서는, 한국의 고도성장이 조국근대화, 공업화, 수출증대로 연결되면서 자본가들의 이윤추구로 생활환경은 무한대로 파괴되고, 성장에서 얻는 효과보다 파괴된 환경을 되살리는데에 지출할 비용이 더 소요됨을 갈파하였다. 또한, 이러한 한국에서의 경제성장이란 미일의 공해산업, 사양산업의 노후시설을 유치한 반대급부이며, 그 폐해는 민족경제의 식민지 종속이며 궁극적으로 생존환경의 파괴라고 전망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반드시 민중차원의 생존권 보호운동, 자립경제건설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농업에 대해서는 자본제적 기업농 중심의 정부시책을 비판하면서, 협엽경영을 통해 공동노동과 공동운영의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문제제기는 1967년 한국협업농업연구소 창립으로 이어졌으니, 선생의 적극적으로 발로 뛰는 활동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석유문제에 대하여는, 유류가 일국경제에서는 혈류와 같은 존재이며 물가에 미치는 비중이나 생산재의 원료나 연료로서의 사용의 다양성에 비추어, 수익성을 떠나 정유공장을 국영화하여 국제석유자본의 압력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년대 초반 진보진영의 일각에서 우리나라를 천민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재벌해체'의 주장을 개진하자, 원가공재, 가격투자이윤 등의 규제, 독점금지제도의 민주적인 강화가 정책적 대안으로 필요함을 제안하면서도, 그러나 “그렇다면 독점자본인 재벌이 해체된 후의 ‘재벌 없는 자본주의'가 당신이 그리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모습인가”라고 반론하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지양이 민족경제의 궁극적 지평임을 주장하였다. 사회구성체논쟁이 후기에 들어서면서 현학적이고 파벌적으로 진행되자, 초기논쟁의 당사자인 박현채 교수(당시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97년 작고)에게 “난 요즘의 사구체 논쟁을 잘 모르겠소. 좀 내게 그 내용의 진의를 알려주시오”라고 하자, 박교수는 “그건 나도 모릅니다. 요즘 논쟁은 내가 알고 있는 논쟁이 아닙니다.”라는 일화를 들려주며, “논쟁은 현실에 기반하여 실천과 결합되는 논쟁일 때 성과를 이루는 것이지, 타자와 나를 구분시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려는 의도로 하는 논쟁은 무분별한 말싸움일 뿐이다.”며 논쟁의 자세와 효능성에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생의 이러한 실천적 면모는 이미 자신의 개인사 속에서도 일관되게 견지되었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이틀전에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한 탓에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고, 그로 인해 4년여 해직되어 고통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그후 대선시기 민주진영의 엄중한 중심을 지키며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지켰다. 80년대 후반 학내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선생은 동료 교수들의 자발적인 지원과 격려 속에 총장후보로 추대되었으나, 미련 없이 사퇴하였다. 평소 선생은 “자신의 안위나 지위문제로 대학사회에서 ‘밥그릇 투쟁'은 하지 않았으며, 대학민주화는 사회민주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며 정년퇴직 때까지 교수사회의 파벌문제에서나 자리에서나 초연했던 연구자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디지털 경제학이니, 지식기반경제학이니, 정보경제학이니 하며 정치경제학의 위기와 주제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지만, 선생은 이미 50년대 말부터 당시 시대의 모순을 정면에서 맞서 민중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논쟁을 주도하여 경제학의 지반을 넓히며 치열하게 진리를 궁구하는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선생은 오늘날 ‘민주교수'의 효시이고, 민중진영의 대부이며, 한국경제사학계의 대들보의 한 분으로 자신의 학문과 삶을 일치시켜 나아간 기념비적인 학자로 기억될 것이다.

 

2002년 3월 11일 중대신문 <중앙의 학자를 찾아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