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곡기념사업회
 
 
       
 
   
  제9회 일곡유인호학술상 수상소감문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18-05-15 22:44     조회 : 1126    

수상소감

 

최 원     

 

  먼저 저의 부족한 책 <라캉 또는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에 영광스런 일곡 유인호 학술상을 안겨 주신 일곡기념사업회와 맑스 코뮤날레 선생님들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립니다. 일곡 유인호 선생님께서는 민족, 민중, 민주의 경제학자로서, 일찍이 1960년대부터 한국 경제의 미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 및 한국자본주의의 착취체제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하셨을 뿐만 아니라, 환경과 생태, 농업, 자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민중적 경제학의 문제의식들을 정초하신 진보학자들의 큰 스승님이십니다. 이러한 유인호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매해 수여하는 일곡 학술상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조건들 속에서도 민중의 편에 온전히 서서 이론과 실천을 혁신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진보적인 후배 학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다른 선배 수상자들의 뒤를 쫓아 어떤 지적 전통을 이어나가는 일에 하나의 매개 고리가 된 것이 무한히 기쁘면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라캉 또는 알튀세르>2008년에서 2012년까지 시카고 로욜라 대학에서 앤드류 커트로펠로 선생님의 지도 하에 쓴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어로 옮기고 또 수정보완하여 출판한 책입니다. 고대철학에서 현대철학까지, 대륙철학에서 분석철학까지, 모든 철학 영역에서의 논의를 섭렵하고 계신 커트로펠로 선생님의 지도가 없었다면 저의 책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저는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칸트를 커트로펠로 선생님께 배웠으며 그 흔적은 저의 책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비록 지금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지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는 데에는 단지 커트로펠로 선생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도움이 있었습니다. 맑스주의를 제게 가르쳐주신 많은 선생님들, 특히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의 이론을 가르쳐주신 서관모 선생님,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대한 좌파적 분석의 모범을 보여주신 강내희 선생님, 심광현 선생님의 선행 연구가 없었다면 저는 이 책을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서관모 선생님은 1995년 좌파 계간지 󰡔이론󰡕에 제가 독자 투고한 형편없는 글을 함께 읽어주시고 다듬어 실어주심으로써 제가 이론의 영역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이메일조차 없던 때라 미국 보스톤에서 무턱대고 팩스로 󰡔이론󰡕 지 사무실로 원고를 전송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전화를 주셔서 서관몹니다!”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이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미처 언급하지 못한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도움 속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선배, 동료, 후배 학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현대정치철학연구회에 있는 많은 선생님들은 저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진태원 선생님, 김상운 선생님, 김정한 선생님, 양창렬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동료 학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상이한 이론작업을 통해, 그리고 논쟁을 통해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동지적인 자세로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누는 삶을 오랫동안 이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는데 아낌없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주신 난장 출판사의 이재원 편집장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책에는 두 개의 또는이 등장합니다. 가장 눈에 띠는 첫 번째 또는은 물론 제목에 나와 있는 것으로, 라틴어의 sive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sive라는 말은 스피노자의 저 유명한 ‘Deus sive Natura’라는 정식에 등장하는 것으로 그것은 수렴과 발산을 모두 포함하며, 따라서 어떤 과잉’, 어떤 복잡함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나중에 알튀세르의 제자인 피에르 마슈레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말한 또는이 바로 이러한 sive임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제 책에 등장하는 또 다른 또는은 라캉이 언어의 장 속에서 주체의 소외또는 종속을 개념화하면서 도입한 것으로, 라틴어 vel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또는은 구조주의적 정신분석가 라캉과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동일성과 이단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vel에 해당하는 또는은 라캉이 강제된 선택이라고 부르는 주체 종속의 메커니즘을 설명합니다. 노상강도로 등장하는 대타자는 너의 돈을 내놓을래, 또는 너의 목숨을 내놓을래?’라고 물음으로써 주체가 선택하도록 만듭니다. 이 선택은 돈을 내놓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지만 목숨을 내놓으면 자연스럽게 돈마저도 잃게 되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은 이미 대타자에 의해 미리 행해져 있으며, 저 질문은 단지 그것을 주체에게 선택의 형식을 통해 대타자의 명령을 강제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된 선택은 정확히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호명 개념을 가공하면서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번엔 경찰로 등장하는 대주체 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대표자는 지나가는 행인의 뒤쪽에서 헤이, 너 거기!’라고 부릅니다. 이 때 행인은 돌아설 것인가 또는 말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행인은 돌아서지 않을 경우 곧바로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돌변하는 경찰에 의해 쫓기거나 체포되기 마련이지요. 때문에 이 행인이 마주하고 있는 선택은 라캉의 이론에서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강제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vel로서의 또는을 공유함으로써 라캉과 알튀세르는 주체가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성되는 존재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외의 상태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 두 사람은 상이한 선택을 하며 그것이 바로 제 책 제목에 등장하고 있는 과잉으로서의 sive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라캉은 이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가 대타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성적 대타자의 지배로부터 분리되기 위해서는 부성적 상징법칙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 상징적 아버지는 주체에게 모성적 대타자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하나의 욕망을 금지함으로써 다른 모든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라캉은 상상계에 특징적인 공격성뿐만 아니라 실재계와 관련하여 생겨나는 도착적 폭력을 제어하고 주체가 문명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 자율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길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라캉을 극단적 폭력이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한 이론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알튀세르는 소외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다양한 심급들로 이루어져 있는 복잡한 사회적 전체 및 그 속에 기입되어 있는 계급적대가 이데올로기 안에 만들어내는 반향 및 균열에 주목하면서 이데올로기 자체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이론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행한 유일한 긍정적인 정의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곧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들이 갈등을 인식하고 싸워 해결하는 형태라고 규정했던 그 정의 말입니다. 알튀세르에 대한 숱한 오해와 달리 그는 일관되게 해방과 변혁의 정치를 이데올로기와 또 다른 심급들의 비동시성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던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상이한 이론적 선택지는 그러나 단순히 하나를 기각하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택할 수 없음, 이 결정()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 저는 sive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근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에 기반한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 혁명이 주권과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비극적으로 실패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는 우리가 단순히 비폭력의 노선을 채택하고 그 모든 폭력을 비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부정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종의 폭력성을 우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방과 변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극단적 폭력에 의해 도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는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혁명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이 난제를 이론적으로 사유하고 실천적 대안들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저는 우리에게 라캉과 알튀세르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자본주의는 점점 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지만, 이 위기가 자동적으로 진보적인 대중운동에게 절호의 기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오히려 종교적 근본주의, 네오파시즘, 인종주의 등이 세계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대중들은 이러한 극우적 이데올로기들에 현혹되고 있으며 진보적 대중운동은 오히려 위축되어 있습니다. 이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요? 아마도 있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의 재발명을 통해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년에 쓴 글들 안에서 알튀세르는 우리가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한 공산주의의 출현을 기대했었지요. 그러면서 그는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생태운동, 청년세대의 운동 등을 언급했습니다. 이 모든 운동들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쉽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지향들로 인해 갈등하고 쟁점을 형성하는 운동들입니다.

    저는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단지 이 운동들 가운데 자신의 입장과 가장 부합하는 단 하나의 운동을 택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들을 넘나들면서 그 운동들이 연대할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묻고 분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맑스가 말했듯이, 자신들만의 당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번엔 맑스가 말한 것과 달리, 정당들을 포함한 기존의 대중운동조직들 안에서 그 운동의 정당성을 가장 단호하게 옹호하는 분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그 기존의 조직들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실천을 충실하게 벌이면서도 그 속에 형성되어 있는 자기-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운동들과 함께 다수자 운동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차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훌쩍 올라타 그곳에서 작업하고 또 어느 순간 그 기차에서 훌쩍 내려 또 다시 길을 가는 여행하는 자로서의 유물론자의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일곡 유인호 학술상을 주신 일곡기념사업회와 맑스 코뮤날레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이러한 공산주의자의 초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제 수상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